장소 욕구에 반응하기
/전보배
0.
전 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로부터 촉발된 사회적 재난을 맞이한 현재, 오늘날의 미술은 팬데믹 시대에 돌입하여 비장소에 대한 논의와 시·공간성에 대한 변화와 고찰에 대한 요구가 급속히 확장되고 있는 추세다. 팬데믹 시대의 미술은 미디어 기반의 작업들의 확산과 비디오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을 이용한 비대면 미술 활동 등 사이버 스페이스를 통한 가상 환경을 조성한다. 기술적 매체를 통하여 온라인을 장소의 대안으로 삼지만, 전시장이라는 공간은 전시를 체화하기 위한 실제적 장소로 가장 직접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임은 분명하다. 공간을 통한 개인의 전시 경험은 지배적으로 차지하고 시간의 비가역성을 통해 매력적일 수 있는 전시의 현존성은 관객을 장소애로 인도한다.
인간관계는 물론이거니와 인간과 장소와의 정서적 유대 또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지금, 나는 장소를 대체할 방법적 대안을 모색하기보다 장소에 대한 논의의 시기로 해석하려 한다. 몸을 매개로, 몸을 위한 방식으로 일어났던 전시 경험을 돌이킨다. 과거 나의 의식 속에 들어온, 누군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기억을 기반으로 장소에 목격자가 되려는 일이다.
1.
2011년 6월 '여름 한철'이라는 뜻을 가진 스페이스 오뉴월 Space O'NewWall이 성북동에 자리 잡았다. 스페이스 오뉴월은 '예술을 통한 공동체와 지역의 문화적 이슈에 개입하는 다양한 전시, 학술 행사 및 공공미술 프로젝트 수행을 통하여 도시-이미지-문화를 매개하고자' 하는 취지를 가졌다. 그리고 4년 뒤인 2015년 6월, '좋은 집'이라는 뜻을 가진 '이주헌(利宙軒)'을 이름 붙인 '오뉴월 이주헌'이 마찬가지로 성북동에 분관처럼 자리 잡게 되었다. '스페이스 오뉴월'이 전면 유리로 내부의 전시를 엿볼 수 있는 보통의 화이트 큐브 갤러리인데 반해, '오뉴월 이주헌'은 주거를 목적으로 지어진 오래된 한옥을 개조한 공간이라는 점으로 두 공간의 성격은 확연히 달랐다. 2021년, '스페이스 오뉴월'은 전시 <레몬 감자 생강> 2017을 마지막으로 운영을 종료하였고, 오뉴월 이주헌만이 운영되고 있는 상태다.
서울에는 오뉴월 이주헌 이외에도 한옥을 개조해 전시장으로 만든 곳들이 있다. 아마도 서울에서 한옥을 개조한 전시장으로 가장 잘 알려진 소격동의 '학고재', 팔판동의 '학고재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 성북동에 '오래된 집', 마지막으로 2019년 운영을 종료한 통인동의 '시청각'까지가 직접 다녀본 곳으로 추려진다. 이 공간들은 모두 전통 한옥을 개조한 공간들로, 목조 골격만을 유지하여 한옥의 외관을 유지하되 이를 제외하고 현대적 요소로 탈바꿈 시켰다. 전시를 위한 가벽을 세워 하얗게 칠하고 바닥은 우레탄과 시멘트와 같은 현대적 건축 요소를 이용해 재정비를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내부의 모습은 대게 비슷하지만 한옥의 구조 자체에서 차이점이 많이 드러난다. 대표적인 한옥의 구조는 지리적, 기후적 조건에 따라 'ㄷ'자 구조부터 'ㅁ'자, 'ㄱ'자, 'ㅡ'자 로 나뉘고 각각의 공간들은 이러한 구조의 차이와 마당의 유무 등으로 공간의 성격이 갈라진다. 그중 이주헌은 'ㄷ'자 한옥으로 지어졌지만 이웃과 공유하는 콘크리트 담벼락이 세워진 탓에 'ㅁ'자 한옥의 구조가 되었고, 그 까닭에 아늑하고 내밀한 분위기를 지닌다.
한성대 입구역은 오뉴월 이주헌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이다. 이 역전에서 성북동 방면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키 큰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이 듬직이 늘어선 한적한 길로 들어선다. 줄 선 오래된 가게들을 지나 성북로8길 8-6, 두 사람이 거닐기에는 버거울 만큼의 좁은 골목에 들어서고, 정사각형의 간판이 한옥의 대문 위에 달려있다. 좁은 골목 앞에선 대문은 도어록이 달린 오래된 나무 대문이다. 문은 한 짝만 열려있어 한 명 만이 지나다닐 수 있는 폭이다. 이 문턱을 넘으면 빼곡한 골목 안에 숨겨져 있던 햇빛을 그대로 받는 안온한 공간이 관객을 맞이한다. 수도꼭지가 딸린 작은 마당을 가졌으며 사무실로 사용 중인 듯한 방을 제외하곤 문틀이 다 떼어져 마루와 방 구조가 시원스레 드러나고, 이 나무 문틀들은 한데 모아 마당 귀퉁이에 기대어 놓았다. 기단은 타일을 이용해 새롭게 마감했는데, 관객들은 전시를 보고 바로 공간을 떠 나기 보다 이 기단과 툇마루에 둘러서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자연스레 이 곳에서는 그렇게 된다는 점이 전시에 아주 넓디 넓은 동선이 짜여진 것처럼 느껴진다.
숨통이 트일 만큼의 거리조차 확보되지 않은 곳들이 지배적으로 많아진 탓인지 어떠한 전초 없이 작품을 들이받게 되는 전시공간과는 달리 전시장의 초입이 주어진다는 것과 나아가 그 전시공간으로 가는 풍경은, 작품과 유리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 점점 더 확실해진다. 전시공간이 아닌 곳, 카페나 식당, 서점 등 어디든 간에 어느샌가 특정 공간을 편안하게 느끼고 있다면 그 이유는 그곳으로 가기까지의 풍경이 생각보다 많은 비중을 점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무의식의 일부분 같은 것이라기보다, 아마 우리는 당연시 그곳으로 가기까지의 풍경과 장소[1]를 이미 동일시하고 있다. 교통이 편리한지, 언덕이 없는 저평한 지대인지 라던가 n차선 도로, 주변 소음의 크기, 사람들의 밀도와 주 연령층,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공간, 그곳에서 드는 빛과 그늘의 조화 등 개인의 취향이 반영되는 가늠하기 어려울 여러 요인들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 요인이 작용하는 풍경의 조건들을 지나 도착한 장소는 개인에게 안락함, 안정감 같은 것을 느끼게 하고 이러한 기분을 가져다주는 조건들은 장소를 열린 상태로 맞이하게끔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장소 를 획득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뿌리 깊은 욕구다. 부산스러운 장면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길, 한적하고 고요한 집에 놓인 이주헌의 전시를 가는 길은 언제나 즐거웠다. 사람들에게 인기 없는 장소로 가는 길은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볍기 때문이다. 이것은 슬프지만 사실 같은 것이 아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1 장소의 용어 사용은 인본주의 지리학 견해에 기반한 장소 접근을 통한다. 인문지리학에서 장소는 인간의 존재적, 정서적 목적을 위해 필요로 하며 인간관계 사이 상호작용과 관계 맺음을 토대로 장소를 이해하는 접근법을 가진다. 장소와 인간의 관계는 사람들과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필수적이고 다양하며 때로는 불쾌한 것으로, 의미 있는 장소를 경험하고 창조하고 유지하는 방법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인문지리학의 요점이다. 인문지리학의 창시자 이-푸 투안은 공간과 장소를 가치 생성의 여부로 구별하며 이는 개인의 경험에 기반하여 부여된 가치에 따라 공간이 곧 장소로 변모하게 되는 개념의 구분을 지닌다.
이 푸 투안, 구동회·심승희 옮김,『공간과 장소』, 대윤, 2007
2.
이주헌이라는 장소를 동심원으로 축적된 많은 기억들 중에서도 어떤 장면만을 아직까지 또렷하게 재생시킨다는 마술적인 경험을 한다. 나는 2017년 6월 스페이스 오뉴월에서 열린 김지현 작가의 전시 <진취적 관객론_관객 행동론 연구>(The Realm between Spectator and Performer)의 관객이다.
전시장은 자연광과 연출된 조명 아래 반사체가 되는 오브제들을 배치한 상황들로 인해 분산되는 무지갯빛들로 가득 차 있었다. 관객은 전시장에서 감상을 위한 적극적인 움직임을 취해야만 했고, 그렇게 해야만 작품을 찾을 수 있었다. 아트바바 홈페이지에 아카이빙 되어있는 전시 소개 텍스트에는 '자발적 참여라는 명분 아래 몇 되지 않는 선택지 내에서 소통과 참여를 강요당하는 폭력적 구조에 대한 은유'라고 쓰여 있고, 이때 즈음을 떠올려 보자면, 관람을 위해 신발을 벗어야 하거나 안전모를 써야 했던 일련의 경험들이 스친다. 기억에 별다른 검열 없이 그간의 경험들을 맥락화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나 또한 관객의 손을 잡고 매니큐어를 발라주는 <간단한 활동>을 하고 있을 때였으니 관객의 개입과 인터랙티브 등에 관한 특정 논의가 활발했던 시기라고 유추한다.
김지현 작가의 전시 <진취적 관객론_관객 행동론 연구> 또한 마찬가지로 단상 위에 올라가거나 손전등을 비춰야 하는 등의 관객의 자발적 참여를 요구하는데, 다만 이것이 '의도적인 폭력성'으로 작동 가능한 이유는 지킴이도 지시문도 없는 전시장에서 관객은 전시장에 비치된 한 장의 캡션지만으로 작품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점이다. 개인적인 성향을 이유로 관람을 위해 어떠한 조치나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하면 거부감이 먼저 들 때가 있는데 이때의 거부감은 수고스러움 때문이 아닌, 그것들에게서 보이는 부풀린 몸집이 오버스럽게 느끼기 때문일 수 있다. 이에 반해, 전시장은 눈에 담기는 작품의 가짓수는 얼마 되지 않는데 손에 든 캡션지는 그보다 긴 듯했고 그러다 보니 오히려 손에 쥔 캡션지 한 장이 시니컬하게 여겨진다. 은색 종이 패널과 플라스틱 수정구들로 전시장은 내내 산란되는 빛들로 가득 찼으며, 이러한 빛을 통한 접근법은 전시의 제목인‘진취적 관객론'에 적절히 대입된다. 제대로 '보기'를 위한 재료로서의 빛은 작가에게 투명한 재료로서 주어지고 무지갯빛은 반복적이다.
아카이빙 되어있는 전시에 대한 텍스트[2]는 다시금 그날의 기억을 파편적으로 불러오지만, 내가 오뉴월 이주헌을 기억하는 동심축이 된 작업은 이미 알고 있다. 손에 쥔 캡션지를 따라가다 발견한 작업은 <when you are on time>기름, 비눗물, 홀로그램 종이, 설치, 상황, 가변크기, 2017. 전날 비가 와서 생긴 웅덩이인지, 마당 수도꼭지를 틀어 고의적으로 만들어 놓은 웅덩이인지 모를 웅덩이다. 작가는 전시장 마당 아스팔트 바닥 작은 물 웅덩이에 기름을 떨어뜨렸고, 그렇게 물 위에 생긴 무지갯빛 기름띠가 일렁이는 상황을 관객이 발견하도록 했다. '상황'이라고 적힌 환상 illusion적인 캡션을 보고는, 전시를 함께 보러 간 친구와 눈빛 교환 후 서로 샐쭉댔다. 관객이 물웅덩이의 기름띠를 발견하길 바라는 억지에 가까운 환상은 작가의 바람을 정면에서 마주하는듯 했다. 웅덩이의 크기는 거친 아스팔트 바닥에 고인 물 정도로 크기가 크지도 않았으며, 드라마틱한 연출을 위한 어떠한 장치가 있지도 않았다. 그저 그 미미함에 '상황'이라고 적힌 캡션이 나를 우연히 장소애 Topophilia[3]로 인도했다.
3 토포필리아 Topophilia는 중국계 미국의 인문지리학자인 이-푸 투안 Yi-Fu Tuan이 만든 신조어다. 장소를 뜻하는 그리스어 topos와 사랑이라는 의미의 philia를 합친 단어로, 우리 말로 장소애 場所愛 사람과 장소와의 정서적 유대감을 뜻한다.
"... 절정 경험으로서의 장소애는 우리에게 환희나 엑스타시, 공포나 절망, 주변 환경과의 일체감, 성취감 등을 준다. 비록 그 경험은 실제로 매우 짧아서 곧 다시 경관에 무심해지는 상태로 돌아가지만, 그 영향은 매우 깊어서 자의식의 변화를 유도하거나 다른 모든 경관 경험들을 판단하는 기준과 같은 시금석과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다."
에드워드 렐프, 김덕현·김현주·심승희 옮김,『장소와 장소상실』, 논형, 2005
3.
막연히 좋은 작업, 좋은 전시를 떠올리려 할 때면 어김없이 이 날의 장소에 접속된다. 감각으로 획득한 어떤 날로부터, 소위 일컫는 '심상'이 불러일으켜지는 것이다. 이것은 공감각으로 다가오는 감각으로 장소와 분리될 수 없는 현상이다. 나의 의식 속에 들어온 이 접속의 경로는 좋은 전시 또는 작품을 기억하는 방식 의미나 형상과 같은 내재적 요인을 떠올리는 것이 아닌, 그날 그곳에서의 기억을 떠올린다는 사실을 획득한다. 관객은 풍경 속에 위치한 자신을 자각하게끔 되고 이는 기억으로 남아, 작품은 유의미한 전시 경험 자체 속 일부분으로 존재한다. 관객의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기억은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기억으로, 이때 작품은 그 매개가 되어주는 역할을 한다.
작가의 의도 같은 것, 그게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것을 궁금하지 않는 체로, 김지현작가의 '상황'이라고 적힌 캡션과 물웅덩이의 옅은 기름띠는 이날에 접속하도록 하는 매개가 되었다. 물웅덩이를 마주하고 남은 막연히 재생되는 기억은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기억이다. 이것은 앞서의 '시금석과 같은 것'으로 자리 잡고, 작가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기억은 나의 기억이 되어 같은 장소에서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며 이뤄내는 접속을 한다. 이주헌이라는 동일한 장소에서 작가와 관객이 같은 기억을 공유하게 되는 마술이다.
“우리는 어떤 예술작품에 반응하여 이전에 없던 무언가를 우리 의식에 취한 채 그 작품을 떠난다. 그 무언가는 그 사건이 나타내는 것에 대한 우리의 기억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하며, 예술가가 사용하고 조합한 형태와 색깔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기억보다도 많은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의식에 취한 것은, 가장 심오한 수준에서 보자면, 그 예술가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대한 기억이다. 인식할 수 있는 사건의 표상은 예술가의 보는 방식을 우리 자신의 보는 방식과 연결할 기회를 제공한다. 예술가가 사용하는 형태들은 자신의 보는 방식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우리가 종종 정확한 주제와 정확한 형태적 조합을 잊고서도 어느 작품에 대한 경험을 떠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존 버거, 톰 오버턴 엮음, 신해경 옮김,『풍경들』, 열화당, 2019
4.
하지만 이내 그 장소를 스스로에게 강탈 당한다. 스페이스 오뉴월의 디렉터가 #미술계 내 성폭력 타임라인에 올라오게 되며 공간에 젠더 이슈가 배태되었기 때문이다. 2016년,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 00계 내 성폭력 고발은 트위터를 중심으로 한 #오타쿠_내_성폭력 으로부터 시작되어 문단, 공연, 미술계 등으로 연일 동시다발적인 폭로가 이어졌고, 한국 사회에 직접적인 젠더 이슈의 시작이었다. 미투 운동으로 이어진 고발을 계기로 페미니즘은 급속히 한국 사회에 퍼져나갔고, 논의는 타당하나 심판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에서 여성들은 연대를 수단으로 삼았다. 리트윗이나 적극적인 지지의 글을 남기면서 의견을 드러내고 소비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명, 대외적인 시위와 공동체 설립 등의 방법이다. 또한, 이슈에 반응하는 이들 개인은 본인이 가졌던 나이브한 태도를 직시하며, 일상적으로 사용해왔던 여성 혐오적 용어 사용과 기존의 취향에 대한 검토를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슈가 진행됨에 따라 한국의 여성인권은 향상되는 것이 아닌 오히려 퇴행하고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남·녀의 대립으로 번진 페미니즘 이슈는 체감상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정치적 문제가 되었으며, 이 용어는 이상하리만큼 아직까지도 그 개념이 정착되지 못한 체다. 누군가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것은 확고한 신념을 가진 채로만이 가능한 것 그리고 그것은 고백과 선언이 되었다. 그 까닭은 해당 발언이 가져올, 다른 이들로부터 받게 될 검열 혹은 비방으로 이어질 가능성 때문이다. 특히나 대중매체는 남성 중심 커뮤니티로부터의 소수의 담론을 전체화하고 증폭시켜 양산하는 추세로 이어져오고 있으며 이는 여성 혐오의 표적이 되기 십상인 사회 분위기를 조장한다.
이러한 환경 속, 이주헌에 내가 가지는 장소애는 공간과 사회적 관계로부터 기인한 의심과 방해로 다시금 인식된다. 그것이 단순히 스스로의 머릿속에서만 간직하고 있는 장면일지라도 더 이상 해당 장소와 기억을 온전히 획득할 수 없게 되었음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이는 장소가 개인의 낭만화 된 기억과 경험으로서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위상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알린다. 장소는 사건이 일어나는 배경, 불변하는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 것이 아닌 사회적 관계에 기인하여 언제든 정체성을 잃고 사라질 수도 있는 가변적인 개념이다.[4]
4 이러한 장소의 개념은 도린 매시 Doreen Massey의 관계적 지리학 관점으로 급진적 개념에 의거한다. 장소는 고정된 실체, 내부 지향적이고 보수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젠더와 권력, 자본 등에 입각한 사회적 관계로 구성되는 진보적 성향의 장소 관점으로 이동한다. 도린 매시는 공간은 독립변수로 존재할 수 없으며 필수적으로 시간과 더불어 개념화되어야 한다는 관계적 지리학 접근을 통하여 장소를 가변적이고 유연한 개념으로 정립시키기에 이르렀다. 도린 매시의 외부 지향적인 관계적 장소 개념을 통해 장소는 고정된 실체가 아닌 끊임없이 형성되는 감각이며 과정으로 이와 같은 견해를 근거를 통해 미술과 장소와의 연계는 더욱 명확해진다.
5.
손에 먼저 잡히는 것을 통해 빠르게 적어가지만 그보다 먼저 다가온 세계가 있음을 안다. 접속의 경로를 파헤친 지금에 전시는 무려 4년치를 앞서 있었다. 난데없는 일이지만 문득이 불러온 신비의 탈을 벗겨야만 했다. 기민한 감각은 동시에 모호한 것이기도 해서 작업은 이러한 감상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그 궁극적인 이유를 파헤치는 과정이 된다. 감각의 이유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증거와도 같은 경험을 되짚어 내러티브를 구축하고 이를 이성으로 세우려는건, 혼자 거꾸로 시간을 들추며 당시를 재구성하는 일이기에 단순한 헛소리 또는 농담 아님 과민반응 등과 마찬가지이며 표면적으로는 의심일 것이다. 조금 더 이도 저도 아니어 보이는 이야기를 하는 일은 흥미롭고, 어느 장르에도 귀결되지 못한 이야기가 미술이라는 장르에 귀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내게 가장 극적이다. 미술이 가지는 필수불가결한 태도에 대한 탐구는 '장소 욕구에 반응하기'[5]로 이어졌다.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의미의 중심인 장소를 배제하는 것은 교환될 수 있는 문제인지. 나는 이러한 질문을 가진 채로만이 다시금 이 장소에 접속할 수 있는, 이 장소를 어떠한 방식으로 획득 할 수 있는지 쫒는다.
5“의미 있는 장소와 관련 맺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뿌리 깊은 욕구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욕구를 무시하면서 힘에 도전하지 않는다면 미래는 장소가 전혀 중요하지 않은 환경이 되고 말 것이다. 이와 달리, 우리가 장소 욕구에 반응하기를 원하고 무장소를 초월하고자 한다면, 인간 경험의 다양성을 반영하고 강화하는, 인간을 위한 장소가 있는 환경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무장소의 지리가 될 것인지, 의미 있는 장소들의 지리가 될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도 온전히 우리 자신의 책임이다.”
에드워드 렐프, 김덕현·김현주·심승희 옮김,『장소와 장소상실』, 논형,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