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heon Lee
O'NewWall Ejuheon, 8-6, Seongbuk-ro 8-gil, Seongbuk-gu, Seoul
2022.5.27 - 6.18
Juheon Lee
/전보배
풍경에서의 접속을 꿈꾸는 전시는 장소와 읽을거리를 찾아 도착하였다. <Juheon Lee>는 2017년 오뉴월 이주헌에서 열린 김지현 작가의 전시 <진취적 관객론_관객 행동론 연구 The Realm between Spectator and Performer>에 대한 리액션으로, 해당 전시를 통해 공간이 장소로 변모하게 되는 장소애 Topophilia의 경험과 장소 이해의 충돌에 반응한다. 스페이스 오뉴월은 2016년 미술계 내 성폭력 관련 젠더 이슈가 배태되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이주헌 利宙軒은 본인에게서 제외하고자 하는 장소임과 동시에 스스로가 공간에 가지는 장소애로 충돌한다. 이주헌에 가지는 장소애는 공간과 사회적 관계로부터 기인한 의심과 방해로 다시금 인식되는데, 그것이 단순히 스스로의 머릿속에서만 간직하고 있는 장면일지라도 더 이상 해당 장소와 기억을 온전히 획득할 수 없게 되었음을 감지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공간이 더 이상 사건이 일어나는 배경, 낭만화시킨 기억의 장소가 아닌 사회적 관계를 통해 재형성된다는 점을 알린다.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의미의 중심인 장소를 배제하는 것은 교환될 수 있는 문제인지 장소 욕구에 반응하는 텍스트로 대응하고 이 장소를 어떤 방식으로 재획득할 수 있는가에 대한 글을 풀어놓는다.
2017년 여름 무지갯빛이 일렁이던 전시장의 물웅덩이에 상황이라고 적힌 캡션을 보고선 샐쭉댔던 기억은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마주했던 기억이다. 우연한 어떤 날로부터 온 끈질긴 인상은 어쩌면 주체적인 미술 감상법이라고도 볼 수 있을 만한 전시로 반응하며, 레퍼런스와 카피라이트로 뒤덮인 전시는 미술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 경로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한다. 조각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조각은 아이클라우드에 고속버스터미널의 공중 화장실에 그리고 아무개의 전시에도 있다. 홀로서는 온전히 세워질 수 없는 형상이 멈춰질 수 없는 시간에서 조각으로 기록되기도 하고, 물질들이 계속해서 이동하는 거리에선 익명이 잠시 기대어 놓은 아름다움을 쉬이 훔치기도 한다. 대개는 유예시키고 있는 상황들로 그렇게 쓰이는 용도가 아닌 것들끼리 지금에 용도에 꼭 맞는 모습이 벌어진 상황에선 많은 것이 엿보이고, 그 모습은 지켜본 이로 하여금 어떤 형태는 마음까지 담을 수 있다고 여기도록 만든다. 그렇게 여기저기서 꿔다 쓴 이미지들은 조각은 하나의 상태라는 것을 비추고 있다.
스웨덴의 그립스홀름 성에는 박제사자와 그와 관련한 짤막한 에피소드가 전해 내려온다. 1700년대 스웨덴, 성 밖에 사람들은 살면서 사자라는 동물을 본 적이 없었다. 아프리카 알제리로부터 여러 야생동물을 선물받았던 국왕 프레드리크 1세는 그중에서도 사자를 가장 애지중지하였는데, 시간이 흐른 뒤 사자가 죽자 땅에 매장시켰다. 그런데 몇 개월이 흐른 뒤에도 안타까운 마음이 사그라들지 않았던 왕은 사자를 땅에서 꺼내 올려 당시 스웨덴의 제일가는 박제사를 성으로 부른다. 원래의 형체를 알기 힘들 정도로 부패해버린 사자의 거죽을 가지고 왕은 박제사에게 박제를 명했고 이를 거스를 수 없던 박제사는 자신이 한 번도 본 적 없던 동물의 형상을 쫓아야 했다. 필요한 모든 정보를 구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어떠한 이미지든 간에 구현이 가능하다는 지 금에서 당시 박제사의 상황은 지나치게 판타지로 온다. 미지에 확률로써 가까워지기 위한 선택을 한 박제사의 손에서 상상이란 신비의 탈은 손쉽게 벗겨지고, 300년이 흐른 지금까지 이어지는 지독한 놀림거리인 결과물을 후세에 남겼지만 그의 이름은 지워진 채다. 특정한 시간대에 사건의 기록으로 남은 짤막한 에피소드를 복기하며 지워진 이름이 가졌던 입장에 저절로 들어앉는다. 그냥 그것이 불현듯 남긴 길어진 자리를 배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