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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heon Lee
O'NewWall Ejuheon, 8-6, Seongbuk-ro 8-gil, Seongbuk-gu, Seoul
2022.5.27 - 6.18

마음을 달리 부르면 이름이 되는 여름

 

​/김현수

 

섬 편지

이번으로 해서 이 섬에 세 번째 방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곳에 다녀간 뒤 5년 만의 일입니다. 지난 여행에서는 바다 날씨가 기승을 부린 탓에 예정보다 하루 늦게 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대신 항구 주변에서 조개를 구워 먹고 파도를 타기도 했습니다. 덥고 즐거웠습니다.

 

급하게 산 쪼리를 벗어두고 모래 장난을 치다가, 신발이 파도에 휩쓸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황당함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런데 쓸려갔던 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파도에 실려서 제가 처음에 그것을 벗어두었던 위치로 돌아왔습니다. 이 왕복은 몇 번을 거듭해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습니다. 뱉어지지도 삼켜지지도 않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그날 바다엔 군인과 경찰이 돌아다녔고 해변 따라 이어진 사람들 사이에서 지금 이 바다에 사람이 빠져 죽었다는 소식이 퍼지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섬에 들어와서 머무는 내내 쪼리를 신고 다녔습니다. 저는 육지로 돌아오고 나서도 이것을 신고 있었는데, 그제야 신발은 망가졌습니다. 바다에서 건져 올린 것이 땅에서도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은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섬 여행에서는 발목까지 단단히 고정할 수 있는 샌들을 챙길 이유가 생긴 것입니다. 섬과 섬 주변과 집으로 이어지는 행로에서 제가 배운 것은 이 정도뿐입니다.

 

이번 방문을 준비하며 선크림이나 모자보다도 먼저 챙긴 짐이 그래서 샌들입니다. 처음 방문엔 맨발로 걸었고, 두 번째엔 쪼리, 이번엔 샌들이라니 방문을 거듭할 때마다 보강된 신발을 착용해야 하나 싶지만, 신발의 종류가 여행의 강도를 결정하는 것이라면 이런 작고 외진 섬을 방문할 땐 쪼리나 샌들 신는 정도가 적당한 것 같습니다.

 

떠나기 전날 지난번 이곳에서 신세 졌던 분을 만났습니다. 위치가 가물가물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수소문한 끝에 부부가 운영하는 미용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 만났을 당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섬에 정착한 지 1년 되는 날이라고 했는데, 아주머니는 여전히 머리를 만지고 계셨고 아저씨는 마을의 이장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아쉽게도 이장님은 뵙지 못했습니다.

 

떠나는 날 아침에 숙소 앞 해수욕장에서 수영을 했습니다. 몸을 데우러 물에서 나오면 밤사이 파도에 쓸려 온 돌들의 생김새를 구경했습니다. 포장을 막 뜯은 새 비누처럼 생긴 돌이 있어 소지품을 놓아둔 자리에 옮겨두었습니다. 아주 잠깐동안 돌은 사물의 원형이 아닐까도 생각했습니다. 돌아갈 때 이 돌을 챙기려고 했는데 해변을 떠날 때 잊어버렸습니다. 그럼 잃어버린 것이기도 합니까? 아무튼 이곳에 가져와 들여다보려고 했던 생각은 생각나지 않고, 떠날 때가 되니 주석처럼 달리는 생각들만 늘었습니다.

 

있어야 할 것들이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 것들엔 이유가 없고, 그냥 거기 있는 것만이 당연한 이유이자 목적일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남긴 것이라고는 쓰레기밖에 없을 것이고 제 자신을 책망하지 않으면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이라고는 돈 주고 살 수 있는 것들 뿐입니다.

 

두 번째 방문까지 7년이 걸렸고, 세 번째엔 5년이 걸렸으니 또 그다음까지 걸리는 기간은 더 짧아지리라고 생각하며 떠나는 배에 올랐습니다. 이글은 원래 첫째 날 묵은 숙소 주인께 전하려던 편지입니다. 시간이 없고 고를 단어도 떠오르지 않아 떠나는 날까지도 완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못 만난 사람, 못 가져가는 돌, 못 전한 편지가 이번 섬 여행에서 제가 두고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돌아갈 이유를 남기면 거슬러 가게 되고, 남기지 않으면 흘러서 가게 된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거스르거나 흐르거나, 어쨋든 모두 바다가 하는 일입니다.

 

 

소파

 

오래된 물건을 버릴 때나 그런 것이 버려진 걸 보면 마음 한 구석이 서늘해진다. 이건 버려도 되는 것, 이건 그렇지 않은 것, 중얼거리며 영수증을 찢을 때 나는 소리가 몸 어딘가에서 울리는 것 같다. 특히 버려진 의자나 소파를 마주칠 경우 마음이 유난히 쓸쓸하다. 얼룩지고 헤진 채 거리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가죽이나 천 따위의 덩어리를 볼 때면! 아뿔싸! 때로 이것이 비를 맞고 있으면 더욱 처량해 보인다. 비오는 날 집에는 사람이 없고, 우산도, 마침 열쇠도 없어 계단에 쪼그려 앉은 초등학생처럼도 보인다. 이러나 저러나 의자의 만듦새는 사람 앉아 있는 모양을 닮았다. 빠진 동전이 있을까 시트를 들어내니 영수증 찢는 소리가 난다. 북북. 소파야. 네 덕분에 알게 된 기쁨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영원한 귓속말. 내일 아침에 보고나면 그날 저녁이든 그 다음 날 아침이든 우린 다시 못 보는구나. 나보다 오래되었다고 들었어. 나는 집에 새로 들어온다는 소파가 맘에 들지 않는데, 갑자기 이별하게 되니 내가 네게서 버려진 기분이 든다. 나도 내일 어딘가 우두커니 앉아 있겠지. 목요일에 비가 온다고 한다.

 

 

상상 喪想

 

보고 싶다 보고 싶은데 없다 없는 곳에서도 잘 지낼 수 있을까? 잘 지낼 수 없는 곳이라면 차라리 없는 편이 나아 계속 궁금해 할 수 있으니까

 

주인 없는 이름 주인이 이름을 부를 수 없는 곳에서 나는 너의 이름 대신 너를 너라고 부른다 여기 함께 있을 수 없다면 저기라는 다른 장소를 상상하면 된다 명령이 없는 곳 거기서 네 발은 자유롭고 나는 네가 네 개의 발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손을 내밀라고 다그친 기억을 뿌리치고 싶다

 

네 개의 발은 몇 개니? 다 알면서도 물어보는 뻔뻔함과 멍청함 사이에서 귀인은 어떤 조짐을 발견한 표정을 하고 있다 당신과는 무관한 아픔이잖아요, 그런데도 사랑합니다, 용서하세요, 해주세요,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더 완곡한 요청을 위해서라면 무릎과 손과 입이 분주해질 필요가 있다 무엇을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 네 모든 고통이 나와는 유관하다는 듯

 

네게 자장가를 들려주고 싶다 단 하나의 의미만을 가진 노래 창밖으로 달이 지나가도 잘 자라는 뜻이다 아이가 혼자 남아 엄마를 기다려도 어서 자라는 뜻이다 너를 지루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적막이 최고의 자장가라고 생각되는 날조차 오래된 노래를 찾아 들었다 칠판 위가 아니더라도 관성은 설명될 수 있다 앓고 난 후 버린 습관은 몸을 자주 뒤집는 날이면 망설임 없이 나를 찾았고 여기엔 지름길이 있는 듯했다 밤사이 물어뜯은 무성한 손톱을 모아 새로운 손톱 하나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 손에서 입으로 가는 가장 어렵고 복잡한 경로를 찾아낸 뒤에 잊어버리고 싶었다 없는 곳에 대한 상상을 구체화하고 보존하는 연습이 될 수도 있겠다

 

 

마음을 달리 부르면 이름이 되는 여름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딱딱하게도 부드러운 것 그러나 삼킬 수 있는 것 외로는 삼키지 말아야 할 것 플라스틱인 줄 알았는데 도넛 위에 발린 초콜릿이었고 삼키고 싶게 생긴 것들은 죄다 모형이었다 달고 맛있는 플라스틱이 있다면 즐거울텐데 여기에 적당한 이름 붙이려거든 있는 것 가운데 아직 없는 것을 찾아야한다 이름에 마음을 뺏겼으니 이제 마음을 뭐라고 부른담? 슬기나 지혜가 모자라 머리가 금방 더워지는 것은 문제의 계절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날씨가 사람을 바꿀 수 있다면 가을이 일찍 온다는 소문이 반갑다 아무도 모르게 달력을 손으로 그리다 보면 왕복은 돌아오는 연습이 아니라 달아나는 연습이라고 믿게 된다 모르겠으면 다음 주문을 외우세요! 이 활동은 겹겹이 의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죠 주문을 잊어버리지만 않으면 난해한 예문이 주어져도 상관 없었다 잊는 일에 필요한 시간은 버리는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이해하면 쉽다 실수가 잦은 산수다 둘 중에 두가지를 포기해선 안된다고, 하나라도 소홀히 했다간 야위고 어두워질 것이다 낮의 혀가 짧아 일기로 적을 것 없는 생활 벌어진 농담과 농담 사이로 슬픈 표정이 뜬다 쓸 데가 없어서 쓸데없게 된 이야기 재미가 없으므로 농담이 아니지만 없는 건 없는대로 무해하니까 좋다 얼음은 녹음 사이에 있고 녹음 사이에서 더욱 빛난다 충분히 짙다면 주문을 외우지 않는 방법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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